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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사진

#2월필름_"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영랑 김윤식 시인의 시(詩) '모란이 피기까지는' 중에서

 

날이 따뜻해지고 꽃이 피는, 봄이 다가오고 있다. 서울에서 지방 출신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돗자리를 펴 가만히 누워있기 시작하는 그런 때.

 

이제껏 서울의 봄만 쫓기 바빴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 친구와 전라남도의 강진으로 떠나기로 계획을 잡았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조금 이르게 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고, 주말이랄것없이 울려대는 전화로 받는 스트레스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찾은 게 템플스테이였다.

 

서울에서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 고민도 조금 되었지만 기왕 도망치는 거 해외는 못 나가니 땅끝이라도 가야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굳혀졌다.

 

강진에 도착하고 처음 셔터를 눌렀던 사진, 반이 타버렸지만 그런대로 필름의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다.

봄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이기도 한 2월, 여자 친구는 영랑생가에 도착하자마자 외투를 벗어던지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반도 땅끝의 2월은 서울의 2월과는 사뭇 달랐다. 언젠가 스무 살 때 갔던 2월의 일본이 더웠던 걸 떠올렸어야 했나 보다. 

나는 친구에게 빌린 수동필름 CANON AE-1을 쓰고 내가 쓰던 CANON AUTOBOY는 여자친구가 들었다.

강진에 도착하자마자 점심만 해결하고 애초의 목적인 백련사로 향하려 했으나 웬걸, 만두집 주인분이 전남 관광해설사 출신이셨다. 템플스테이만 생각하고 떠나왔다 보니 강진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마당에 주인분의 추천으로 바로 터미널 근처인 영랑생가를 오게 된 것인데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부터 평일 오전의 여유로운 풍경, 그리고 막 피기 시작한 동백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영랑생가 뒷편에 떨어져있는 동백꽃들

3월 중순부터 만개했던 동백이 본격적으로 떨어지는 절경이 펼쳐진다 하였는데 못 보고 보는 풍경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아름다운 동백길이었다.

 

천천히 풍경을 즐기며, 그곳에서 만난 주민분들과 사담도 섞으며 근처 사의재까지 여유로이 둘러본 뒤 택시를 잡아 늦지 않게 백련사로 향했다.

 

천년고찰, 강진 백련사

템플스테이를 고를 때 우리는 특별히 어떤 프로그램들을 이것저것 체험해보기보다는 가만히 쉴 수 있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찾아보았고 열심히 검색한 끝에 동백림이 아름답고 다른 프로그램 없이 가만히 쉴 수 있는 백련사로 결정하게 되었다. 규모가 웅장하다거나 크지는 않았지만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련사의 풍경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비록 기독교지만 어릴 때부터 절의 풍경과 분위기를 좋아했는데 백련사의 스님들께서는 수많은 방문객 중 한 명일 뿐인 우리를 편하게 맞이해주셨고 머무르는 동안 따스히 대해주셨다. 백련사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1시간의 차담 또한 창밖으로 보이는 강진만을 바라보며 해주시는 말씀들이 아직도 생생할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하루는 아쉬울 것 같아 3일로 잡아버린 백련사 템플스테이. 스님과의 차담, 아침 점심 저녁 공양시간을 제외하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부작용이랄까, 노트북은 불안했지만 진작에 놓고 왔고 핸드폰은 최대한 자제하려 했으니 도무지 할 게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려 간 곳이긴 한데, 아무것도 안 하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백련사에는 만덕산과 다산초당, 동백림 등이 있었고 가만히 있으려니 견디지 못하겠던 나와 여자 친구는 서너 번이고 그 길을 올랐다. 

백련사 동백림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초당 동암

다산 정약용, 그가 머물렀던 공간과 오갔던 길을 다니며 스님들을 통해 듣는 이야기와 박물관 등을 통해 그 어떤 역사 책보다 생생하게 그의 생애를 느낄 수 있었다. 2월의 강진은 정약용 여행이라 해도 좋을 만큼, 실학파가 될 뻔한 그런 여행이었달까.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못다 본 강진을 둘러보기로 한 우리는 처음 만난 해설사 분과 초당에서 만난 해설사분이 꼭 가야 한다 추천해주신 태평양 차밭, 강진다원을 먼저 새벽같이 보러 떠났다.

"보성녹차밭보다는 작지만, 여기는 새벽같이 가면 금빛 다원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 꼭 동틀 때에 맞춰서 가."

그 말에 아침 7시부터 달려 도착한 월출산 강진다원은 말 그대로 금빛이었다. 시간도 이른 시간이다 보니 그 큰 공간에 우리 둘 뿐이라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었던 것 같다.

영랑생가부터 사의재, 백련사의 템플스테이, 가우도, 금빛 강진다원, 그리고 시간이 남아 떠난 미황사까지. 강진의 여행은 원래의 계획보다 충분한 쉼과 추억이 되어준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여행 내내 처음 써본 수동 필름 카메라인 CANON AE-1이 실수로 다 날아가버리지는 않았을지 걱정되어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맡기고 받아본 사진들처럼 따뜻하게 남아있을 강진의 2월. 언젠가 모란이 필 때쯤 다시 찾아볼까 한다.